우리는 국립극단에서 젊은 극단원으로 십수 년의 세월을 바쳐가면서 연극예술의 꿈과 애정을 키워온 연극배우들이다. 현재 서계동 국립극단 땅(敷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 곧 문체부의 ‘복합문화시설’ 조성계획 소식을 접하고, 우리는 귀를 의심하는 황당함과 예술적 혼란, 논리적 경악을 금할 수 없다.
국립극단은 대한민국 최초의 국가 전속 극단으로 1950년 민족사의 비극 한국전쟁이 발발한 첫해 봄에 창단되어, 2010년 장충동 남산 국립중앙극장에서 사상 초유의 ‘극단 해체’ 비극과 아픔, 상처를 안고 쫓겨나듯이 서계동으로 내려왔다. 이는 창립 60년 역사의 국립극단을 ‘재단화‘라는 전무후무한 운영 방식의, 파행적인 문화예술 정책에 연유한 것이었다.
그 당시 문체부는 연극인들에게 국립극단 전용극장의 꿈을 심어주었다. 이후 우리는 지금까지 명실상부한 국립극장을 꿈꾸며 육군 기무사 수송부 막사를 개조해 만든 극장에서 피 끓는 심정으로 창작의 불꽃을 피워왔다. ‘국립’이라는 말이 무색한 가건물 공연장에서 인고의 시간을 감내한 것은 ‘아름다운 국립극장’ 건설이라는 원대한 꿈과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희망을 짓밟고 문체부는 지난 5월 25일 서계동 국립극단 부지에 복합문화시설을 건립한다고 발표했다. 말이 좋아 복합문화시설이지 실상은 연극을 사지로 내몰고 돈벌이를 하겠다는 것이다. 21세기 문화강국의 이상을 실현해야 할 국가적 과업과 책무를 망각하고 기초예술인 연극을 천대하는 정책에 참담할 뿐이다.
국립극장은 모든 국민과 연극인이 어우러져 다채로운 상상력과 정서, 인간세계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기본적인 문화예술 공간이다. 한 나라의 문화예술은 곧 국가의 품격과 자부심이다. 이 국격과 자부심을 상업적 논리와 천민자본주의적 발상으로 오염시켜, 국립극장을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공무를 맡은 자들은 주인인 국민의 뜻을 마땅히 살펴야 한다. 그런데 문체부는 그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는, 국민에게 사랑받지 못할 건물, 국가의 자부심이 되지 못할 흉물을 만드는 데 혈세를 낭비하고 있다. 국가적 중대사를 충분하고 다양한 논의도 없이 졸속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국민의 뜻을 모르쇠로 일관하며 오만과 독선에 빠져 있다. 입으로는 문화융성 시대를 외치면서 국민의 자존심과 예술적 국격인 국립극장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헛짓거리를 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회초리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누구의 배를 불리기 위한 헛수작이란 오해를 받기 딱 좋을 일을, 당국자만 모르는 아둔함을 일깨우고 그릇된 국책사업을 바로잡고 싶다.
우리는 요구한다. 현재 추진하고 있는 사업은 전문성과 정체성이 없는 전형적이고 몰지각한 건축사업이다. 이런 사업을 당장 중단하고 폐기하라. 말도 안 되는 사업을 일방적으로 확정하고서 현장의 의견을 수렴한다는 형식적인 절차로 면피할 생각 말고, 지금 바로 현장 연극인들과 마주 앉아 진정으로 소통하며 창·제작이 가능한 기초예술 중심의 국립극장을 만들라.
이와 더불어 ‘시즌단원제’라는 미명으로 운영하고 있는 불합리한 단원제가 아닌, 주인의식을 고취하는 정규직 단원제 및 운영체계를 논의하라. 그리고 이러한 요구를 무시하고 ‘복합문화시설’ 사업을 강행하려거든 국립극단을 장충동 국립극장으로 복귀시켜라. 이것이야말로 한 나라의 국격에 맞는 국립극단의 위상을 회복하는 길이요, 대한민국 문화예술 발전의 초석이 되는 길이다.
우리는 경고한다. 만일 우리의 요구를 무시하고 잘못된 길을 계속 걷는다면 이는 역사와 국민 앞에 대죄(大罪)를 짓는 것이다. 부디 역사와 국민에게 낯부끄러운 오점과 후회를 남기지 않기를 충심으로 바란다.
2022년 9월 12일
신구, 백수련, 김금지, 박경득, 정욱, 전세권, 권성덕, 전무송, 이호재, 손숙, 이승옥, 오영수, 심양홍, 김재건, 윤관용, 심우창, 문영수, 기정수, 정상철, 이문수, 우상전, 전국환, 김종구, 하혜자, 이경성, 권복순, 조한희, 김용선, 조은경, 서상원, 최원석, 노석채, 곽명화, 계미경, 한윤춘, 이은희 배우 등 전(前) 국립극단 단원(1950년~2010년) 연극인 일동
|